건강을 읽다

 

마라톤 42.195km의 비밀

 

 

마라톤의 거리가 지금과 같은 42.195km로 확정된 것은 1908년 런던 올림픽이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때에는 40.2km로 줄었고,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때에는 42.75km로 늘어나는 등 올림픽 마라톤 거리는 주최 측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결국 1924년 파리 올림픽 때 ‘1908년 런던 올림픽 때를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어 현재의 42.195km로 확정되었다. 이렇게 마라톤 거리가 엿가락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 비밀은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피디피데스가 전한 승전보

 

 

마라톤의 전체 거리는 알다시피 42.195km라는 다소 애매한 수치이다. 단거리 경기가 100m, 200m, 400m 식으로 딱 떨어지는 숫자임을 감안하면 더욱 애매하다.

 

마라톤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B.C. 490경 고대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유래한다. 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의 ‘피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가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승리의 기쁨을 전달하기 위해 대략 40km의 거리를 달려 승전보를 전하고는 쓰러져 숨졌다는 내용이다. 그렇다 해도 굳이 42.195라는 거리는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19세기 들어 그리스는 오랜 오스만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1821년부터 11년간 독립전쟁을 치르게 된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의 군대가 그리스 독립군을 지원한 가운데 영국의 유명 시인인 바이런도 ‘모든 유럽인은 그리스인이다’라고 호소하며 전쟁터로 향했다.

 

 

바이런은 마라톤평원을 찾아 ‘그리스 제도’ 라는 시를 쓰며 그리스의 독립과 자유를 염원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열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바이런의 시에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마라톤 전쟁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영감을 받았다.

 

프랑스 조각가 콜토트는 마라톤 전쟁의 옛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1834년 피디피데스의 조각상을 제작해 파리 튈를리 궁전에 세우기도 했다. 1869년 프랑스 화가 메르송은 승전보를 전하는 피디피데스의 모습을 ‘마라톤의 병사’라는 그림으로 남겼고, 1879년에는 영국 시인 브라우닝이 ‘피디피데스’라는 시를 통해 피디피데스를 극찬하는 등 피디피데스 영웅화가 지속됐다.

 

1869년 프랑스 화가 메르송은 피디피데스가 승전보를 전하는 순간을 ‘마라톤의 병사’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남기면서 피디피데스의 영웅화는 가속화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창설과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문화예술인들을 통한 피디피데스 영웅화 속에서 1892년 프랑스의 교육자 쿠베르탱은 고대 올림픽 경기를 부흥시킬 것을 제창하고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1896년 제1회 올림픽 대회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됐다.

 

IOC가 창설된 1894년 9월 15일, 스위스에 머물던 파리 소르본대학 원로교수 브레알은 쿠베르탱에게 올림픽에 ‘마라톤 경기’를 채택해 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의 편지에는 ‘그리스 병사’와 관련된 마라톤 전쟁의 고사도 곁들여져 있었다.

 

제안을 받은 쿠베르탱은 처음에는 고민했다. 이제껏 겪지 않은 너무 긴 거리를 뛰어야하는 경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부활을 꿈꿔온 쿠베르탱은 그리스를 방문해 현지 사정을 살피고, 실제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의 지형과 거리를 감안해 마라톤 경기를 치렀다. 그 거리는 40km이었다.

 

4년 후인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두 번째 마라톤 경기는 40km보다 조금 길었고 세 번째 대회인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다시 40km를 뛰었다. 그러나 이들 거리가 모두 정밀하게 측량이 된 것이 아니어서 대략 그 정도를 뛰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라톤 공식 거리인 42.195km는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거리가 공식화된 것은 당시 세계를 주름 잡던 대영제국의 힘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마라톤의 시작과 끝은 영국왕실 가족의 편의를 위해서 정해진 것이다. 당시 마라톤 코스 출발은 주경기장에서 하기로 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영국왕실 가족은 출발선을 윈저궁 창문 아래로 옮겨 달라 요청했고, 결승선 역시 로열박스에 앉아있는 왕실 가족이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스타디움에 들어와 트랙을 300m 정도 더 돌도록 정했다. 그렇게 마라톤 경기의 거리가 엿가락처럼 늘어나 42.195km가 된 것이다.

 

그러나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는 다시 40.2km로 줄었고,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때는 42.75km로 늘어나는 등 올림픽 마라톤 거리는 주최 측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다가 1924년 파리 올림픽 때 ‘1908년 런던 올림픽 때를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이 채택돼 현재의 42.195km로 확정됐는데, 이 역시 대영제국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올림픽 마라톤은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

 

 

 

1908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은 극적인 화제성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42.195km 거리로 처음 치러진 당시 경기에서 이탈리아 선수 도란도가 결승점을 불과 200여 미터 앞두고 쓰러졌다. 그때 의사였던 경기 임원이 그를 부축해 주었고, 도란도는 그 임원의 부축을 받아 1위로 골인했다.

 

그러나 2위로 들어온 미국의 헤이즈 측에서 부정행위라며 이의를 제기하여 도란도는 실격 처리됐다. 그 소식이 <더 타임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여론은 들끓었고, 결국 재대결로 이어졌다. 그 해 11월 뉴욕 스퀘어 가든에서 펼쳐진 대결과 이듬해에 한 번 더 맞붙은 경기 모두 도란도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그렇게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마라톤 거리는 런던 올림픽에서 설정한 42.195km로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의 마라톤 경기는 발원지인 그리스 아테네를 넘는 화제성을 남겼다.

 

 

참고로 2004년 올림픽은 100여 년 만에 마라톤 종주국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1회 대회에서 약 40km의 거리로 경기를 치렀던 그리스는 그간 영국에서 늘린 2.195km을 채우기 위해 1회 대회 마라톤 코스인 마라톤 마을~올림픽 스타디움까지의 코스에 유적지를 한번 더 돌고 결승선에 들어오는 변칙을 통해 42.195km라는 거리를 완성했다.

 

거리는 완성했으나, B.C. 490년 마라톤평원에서의 승전보를 전한 피디피데스를 기념한 오리지널 스토리텔링의 힘은 퇴색된 셈이다. 
 

(출처) 대한체육회/체육간행물/2020년 7월호 /스포츠하이라이트/스포츠칼럼 (마라톤 42.195km의 비밀) (https://www.spor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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