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회나 일에서 실수와 패배를 반복한 후 비슷한 과제가 주어질 때, 시도해보기도 전에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며 포기한 적이 있다면 ‘학습된 무력감’을 경험한 것이다.
자신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결과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무기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시도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은 심정.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고, 어느 누구의 도움도 효과가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기분은 인생에서 한 번쯤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미국심리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펜실베니아 대학 심리학과의 마틴 셀리그만(M.Seligman) 교수는 이런 무기력감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습득된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원래 ‘학습’은 뭘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과정이나 절차를 말한다. 그런데 학습된 무기력은 내 행동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셀리그만은 실험을 통해 무기력이 학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아무리 버튼을 누르고 발버둥을 쳐봐도 전기충격이 멈추지 않도록 만든 방에 개들을 집어넣었다. 전기충격은 아무 때나 찾아왔다 제멋대로 사라졌다.
개가 어떤 행동을 하든 전기충격을 막거나 피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랜 학습이 끝난 뒤, 개들은 이제 전기충격을 받더라도 그저 바닥에 누워 낑낑거릴 뿐이었다.
심지어 그 개들은 줄을 풀어주어 전기충격이 없는 옆 칸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이후에도, 버튼을 누르면 전기충격을 멈출 수 있는 방으로 옮겨진 후에도, 그냥 그 자리에서 계속 전기충격을 받기만 했다. 마침내 셀리그만은 개들에게 무기력을 학습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셀리그만은 원래 우울증을 연구하던 심리학자였다. 그가 무기력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우울증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환경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위에 쓴 끔찍한 실험을 통해서 그가 알아낸 무기력의 핵심 조건은 ‘내 의지와 노력이 아무 소용없는 세상’이었다. 우리는 그의 실험과 비슷한 사실들을 여기저기서 들어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릴 적부터 얇은 쇠사슬에 발이 묶여 자란 코끼리는 다 자라서 이제는 그 쇠사슬 정도는 쉽게 뽑아버릴 수 있게 된 다음에도 여전히 쇠사슬에 묶여 지낸다.
학습된 무기력의 힘이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는 아무리 내가 공부하고 노력해도 수학은 이해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빠진 학생들을 말한다.
운동선수들에게도 무기력감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훈련과 연습으로 매일을 채우지만, 그들 중에서 유명선수로 성공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스포츠 분야의 치열한 경쟁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타고난 재능으로 어떻게든 변화를 만들어내서 극복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가난이나 신체적 질병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무기력감의 원인이 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의 영웅인 안정환을 둘러싼 환경은 가난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 그는 초등학생 시절 무당들이 굿을 하고 남긴 제사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웠고, 왕복 4시간 걸리는 버스통학 시간과 차비를 아끼기 위해 학교 체육창고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가 축구를 시작한 이유도 최소 하루에 한 번은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축구인생조차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에 들어갔던 초등학교 축구팀은 해체되었고, 중고등학교 축구부에서는 상습적인 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리며 이탈과 복귀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에게 축구에 대한 애정과 그 축구와 함께 겪었던 처절한 가난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한다.
질병은 또 다른 좌절과 무력감의 원인이다. 모두들 LA 다저스 시절의 국민영웅 박찬호는 알고 있지만 그가 2006년 샌디에이고에서 선수생활을 할 때 ‘장출혈’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상황은 심각했다.
두 번째 장출혈 때는 팀닥터가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질병이었기에 무기력감은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이 무기력의 함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장출혈의 원인을 찾아내 치료한 박찬호는 선수로 복귀해 메이저리거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안정환은 지금도 축구해설가와 방송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우리들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우리가 쏟아 부은 노력 중 많은 것들이 부질없이 사라진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가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무력감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우리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장출혈 이후에도 야구를 계속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숨을 쉬어야 살듯이 나는 야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구 할 수 있는 시기에 야구를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나는 숨을 안 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출처) 대한체육회/2018년 10월호/스포츠하이라이트/스포츠칼럼 (절망의 수렁, ‘학습된 무력감’ 극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