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읽다

 

마녀사냥(마녀재판)이란 무엇인가요?

 

마녀로 판명된 여인을 화형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삽화

 

마녀사냥은 중세 중기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대에 행해졌던 마녀나 마법 행위에 대한 추궁과 재판에서부터 형벌에 이르는 일련의 행위를 말합니다. '마녀사냥'을 '마녀재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녀사냥의 기원

 

중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사회권에서는 악마가 인간이나 동물 등을 이용해 악한 행위를 한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이전부터의 민족 신앙에 대한 불신감이나 십자군 병사들에 의해 동방에서 가지고 온 사상 및 문화 등이 융합하여 생겨났다고 추측됩니다.

 

또 고대 이래, 악마가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근절하려고 애써왔으며,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악마의 하수인으로 여겨진 인간에 대한 규탄이 있었습니다.

 

1669년판 《마녀 잡는 망치》 표지

 

마녀재판은 스위스와 크로아티아의 민중 사회에서 시작되어 이윽고 민중 법정의 형태로 마녀를 단죄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단에 관해서는 깊이 개입했지만, 마녀에 관해서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던 로마 가톨릭이 이단 심문을 통해 마녀 재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5세기에 들어가면서부터입니다.

 

▲요한 바오로 2

 

2003년 3월 5일,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시에 따라 교황청은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해 과거 교회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핑계로 인류에게 저지른 각종 잘못을 최초로 공식 인정했으며, 이때 마녀사냥에 대한 잘못도 인정하며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의 이름으로 사죄했습니다.

 

■마녀 사업

 

 

마녀재판은 상업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녀로 인식이 된 혐의자에게는 사형의 형벌을 내리는데 마녀는 그 혐의를 가리는 동안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마녀가 지불해야 했습니다.

 

고문 도구 대여료, 마녀를 고문하는 고문기술자 급여, 재판에 참여하는 판사 인건비, 마녀를 체포할 때 소요된 모든 시간과 비용, 마녀가 확정될 경우 화형을 집행하는 데 소요된 모든 비용 및 관값, 교황에게 내야 하는 마녀세 등을 마녀 용의자가 모두 지불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마녀가 화형에 처해진 이후 다시 한번 처해지는 형벌이 바로 '전 재산 몰수'형이었습니다. 즉, 마녀는 마녀재판 집행관과 교황에게 급여를 지불해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자신을 살해한 교황과 그 일당들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상속하는 꼴이 됩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마녀의 혐의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잔인한 고문 행위는 유럽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공식적으로 마녀 재판이 사라졌습니다.

 

■마녀 용의자

 

마녀로 붙잡힌 여성을 고문하는 장면 (1577년 작품)

 

마녀 용의자는 주로 엄청나게 부유한 과부들과 무신론적 지식을 갖고 있는 미혼 여성들이였습니다. 이 중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면서 돈은 엄청나게 많은 여자들이 마녀로 잡혀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통적으로 과부들이 많이 잡혀갔는데, 이는 과부는 가족이 없기에 재판에 증인을 서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 약초학을 공부한 자들, 동방(북인도 지역)의 신비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자들, 아프리카에서 숭배하는 부두교라는 종교를 믿는 자들 역시 ‘악마를 숭배한다’는 명목하에 마녀로 잡아갔습니다. 마녀 사냥꾼들은 마녀에 대해 이러한 혐의를 적용하며 설명합니다.

 

“  마녀들은 악마와 성교를 하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이를 실행하기 위해 빗자루를 매개체로서 활용한다.” 

 

 

마녀사냥의 현대적 의미

 

마녀사냥에 대해 정치학에서는 전체주의의 산물로 보고 있고, 심리학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로 보고 있으며, 사회학에서는 집단이 절대적 신조를 내세워 개인에게 무차별한 탄압을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히틀러 나치의 '우생학', 일본 제국의 '불령선인', 미국의 'KKK'과 '매카시즘', 소련과 아프리카 등에서 벌어진 '인종학살' 등이 근현대에 벌어진 마녀사냥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여기지만 오늘날에도 마녀사냥은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마녀’라는 뜻으로 ‘된장녀’, 'xx녀' 등으로 바뀌었을 뿐, 마녀사냥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마녀를 만들어내는 원리, 즉 ‘마녀 프레임’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택광은 "마녀사냥은 특정 시기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일성과 규격화를 요구하는 근대국가는 ‘정상이 아닌 것’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일 필요가 있으며, 마녀사냥의 대상은 주로 여성, 유대인, 무슬림,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등인 것이 그 예인데, 이는 상황에 따라 누구나 마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마녀사냥의 양상도 진화하였는데, 집단이 개인을 상대로 근거 없이 무차별 공격을 해서 '인격 살인'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가 되고 이로 인해 인터넷의 발달이 마녀사냥을 더 용이하게 만들었고,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마녀재판을 하는 방법

 

 


마녀재판에는 네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눈물 시험(Traenenprobe)

 

마녀망치에서는 ‘마녀들은 사악하기 때문에 눈물이 없다, 그래서 혐의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나 시험해보라’고 나와 있습니다. 눈물을 흘려서 혐의자가 죄가 없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바늘 시험(Nadelprobe)

 

바늘시험은 성경 구절의 예언서에서 유래된 것으로, 구원받은 자의 표식으로 이마에 먹이나 도장을 친다는 논리에서 유래됐습니다. 타락한 악마들은 지울 수 없는 표식을 가지고 있으며, 마녀 또한 마찬가지라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재판관이 그녀들의 나체를 관찰하고, 또 관찰의 용이성을 위해 몸의 털, 음모, 눈썹을 깎거나 태웁니다.

 

관찰에 의해 사마귀, 융기, 부스럼, 기미 ,주근깨 등 마녀의 점이 나오면 형리는 그 자리를 누르거나 바늘로 찔러 감각을 느끼는지, 피가 흐르는지 시험합니다.

 

■세번째는 불시험(Feuerprobe)

 

재판관은 혐의자에게 그들의 무혐의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달구어진 쇠로 지지는 것을 견딜 수 있는지, 불위로 걸을 수 있는지, 그리고 다치게 될지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안했을 때 혐의자가 승낙을 한다면 그는 마녀가 됩니다. 마녀는 이 난관을 악마의 도움을 받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네번째는 물시험(Wasserprobe)

 

일반적으로 물은 깨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형리들은 혐의자를 단단히 묶고 깊은 물에다 빠뜨리고, 물은 깨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녀가 들어올 경우에는 물 밖으로 내쳐진다고 믿어졌습니다.

 

만약 혐의자가 물에서 익사한다면, 그는 혐의를 벗게 되겠지만, 물에서 떠오른다면 마녀로 간주되어 화형 되었습니다. 마녀든 아니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녀재판의 대표적인 피해자

 

▲잔다르크 (성녀 요안나 아르크)

 

잔 다르크(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또는 성녀 요안나 아르크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모든 성인의 이름을 라틴어식으로 명하기 때문에, 잔 다르크를 아르크의 요안나 또는 요안나 아르크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세례명으로 쓸 때는 요안나라고 명합니다.

 

■마녀로 몰린 화형 당하다

 

화형당하는 잔 다르크 (쥘 외젠 르느뵈의 그림)

 

프랑스 북동부 지방 동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부르고뉴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현상금과 맞바꾸어 잉글랜드 측에 넘어가게 되었고,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를 재판장에 세워 반역과 이단의 혐의를 씌운 후에 말뚝에 묶어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만17세)였습니다.

 

■훗날 명예를 회복하다

 

프랑스 파리 피라미드 광장에 있는 잔 다르크 기마상

 

그로부터 25년 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재판소는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여 그녀에게 내린 혐의는 모두 무혐의이며 따라서 무죄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순교자로 선언하였고, 1909년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잔 다르크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 루이,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등과 더불어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오늘날 잔 다르크는 서구 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으며, 잔 다르크를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와 만화, 소설, 회화 등의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잔 다르크는 흔히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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